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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편을 지나가는 앰뷸런스의 소리가 순식간에 거리의 사람들을 사이렌 네트워크로 포섭한다.1 사람들은 위기감이 아니라 안도감으로 동조되었다. 사태의 위급성을 조롱하듯 점차 늘어지는 사이렌 소리와 더불어 옅어지는, 연루되었다는 감각. 파동처럼 퍼지는, 면제되었다는 느낌. 소리가 점차 멀어짐에 따라 회복되는,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상. 다행히도 나는 그 위기 속에 있지 않았다. 오늘의 나는 벌어진 사고 속에서 말하는 대신, 벌어진 사고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분위기 속에는 위기가 담겨있다. 로렌 벌랜트는 소리 네트워크에 포집된 무리의 사람들이 진행 중인 현재로 녹아들어가는 가운데 형성되는 중지와 미정의 공간을 앰비언트 시민성(ambient citizenship)이라고 표현했다.2 그 공간이 환희나 공분과 같은 자명한 정치적 감정으로 응결될 수 있었다면, 굳이 이런 단어가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분위기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느낌을 공유하는 가운데 형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느낌으로 결속된 가운데,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파렴치함으로 얼룩진 시민성. 어쩌겠는가? 누구도 물에 빠진 이를 구경하는 입장에 서 있지 않고, 오히려 같은 강에 빠져 함께 허우적대고 있는 처지인데. 익사하지 않고 수면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만드는 일상적인 복종의 경험이 그 강물을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도 흐름 속에 있기보다는 흐름을 읽을 것을 요구받는 장소. 이곳이 오늘날의 사이렌 네트워크이자, 위기 감각의 진원지이다.
이제 회고적인 목격담이 쓰여지기 전, 우리의 머리가 들려온 소리에 반응하여 두리번거리고 있던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소리 사건이 발생하였고, 사람들은 점화되었다.3 곧바로 머리는 소리가 발생한 방향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데, 이때 소리가 나는 방향의 귀와 반대쪽 귀에 파동이 도달하는 과정에서 미세한 시간적 지연이 발생한다. 두개골의 모양과 귀의 형태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이 미묘한 시차는 들려오고 있는 소리의 방위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짧은 순간 속에서 배경으로부터 사태가 추출되고, 청자는 발생한 소리 사건에 말려들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소리가 청자를 동조시키는 것은 아닌데, 모든 음향적 배경이 우리를 그 속으로 연루시킬 충분한 동기를 갖고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록 당장 의미없어 보이는 소리가 가능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소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있을지라도 말이다.
일상적인 청취의 경험은 여러 방위에서 발생하고 있는 소리 사건에 한꺼번에 말려들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구성된다. 그 경험은 벌어진 소리 사건에 우리가 원할 때 개입할 자유, 그리고 원하지 않을 때 거기서 빠져나올 자유 모두와 불화한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그러나 원하는대로 여닫을 수 없는 감각의 불수의성을 대하는 태도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주체의 서사는 변화하는 매체와 감각의 관계 속에서 나날이 재협상된다 - 그것도 대단히 참신한 방식으로. 혹자는 듣고 싶은 소리를 선택해 들을 자유, 그리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차단할 자유를 돈을 주고 구매한다. 누군가는 인식 주체를 한없이 취약하게 만드는 감각의 개방성을 급진적으로 사유함으로써, 비장애주의나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할 실천적 동기를 얻기도 한다. 또 다른 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자유를 복원하고 확장하기 위해 분투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들은 언어도단의 진창 속에서 뒤섞이고 있는 ‘···할 자유’와 ‘···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하지 않을 자유’를 구분하는데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자유를 새로이 정의하려고 한다. 필요하다면, 기존에 자유가 의미하는 바를 파기할 태세까지 갖추고서는 말이다. 이들은 세계 속의 다른 몸들이 환경 속에서 만나고 거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할 때, 예기치 못했던 순간 몸이 만끽했던 그 해방감을 묘사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 분투할 때라야만 자유를 다시 정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이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각자의 경험과 편향, 믿음으로 구성된 고유한 여과기인 귀의 상황에 있어서도 비슷하다. 이미 모든 소리를 생경하게 듣고 있는 귀는 모든 소리에 대해 점차적으로 깨어나고 있다. 반면 생존에 직결된 소리가 아니라면 반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귀에게, 그 소리들은 묵음 또는 약음 처리된다. 우리의 선조가 숲속에서 들려오는 포식자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로부터 아드레날린을 분출하였듯, 동일한 종류의 동물적 생존 본능이 자본주의적 생존 양식 속에서 익사하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이들의 청취 양식을 패턴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생존에 성공한 선조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자유의 의미를 새로이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은 알 수 없는 적의와 불만에 가득 찬 채, 생존과는 하등 관계없는, 나아가 생존에 방해가 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간을 저당 잡히는 대가로 편입된 임금노동 체계 속에서, 몸의 움직임이 돈을 받고 시간 단위로 팔려나는 재화라는 사실은 엄혹한 현실이다. 움직임을 팔아 밥을 벌고, 그 밥을 태워 움직인다는 합리적 생존의 경로는 움직이고 있는 몸에 내재하고 있던 삶의 충동들과 경향성을 점차적으로 포획해 나간다. 이 포획의 과정은 몸을 예정 경로로부터 이탈시키는, 마주친 몸들을 동기화하는 경향의 만남을, 즉 대안이 될 수 있었을 가능성들을 차단한다. 따라서 자유를 다시 정의하고자 분투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자유의 대안적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고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대안은 언제나 현실적인 비용 못지않게 인지적 수송비를 소모하는데, 작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바로 이 인지적 수송비를 덜어주는 대가로 특유의 시간 정치의 구조를 존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절감해준다고 여겼던 바로 그 경험들을 다른 방식으로 배치하고 재구성하지 않으면, 자유를 새로이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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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생각하기 전에 움직인다는 것 - 말려든 채로 머리를 두리번거리는 일, 움직이면서 듣기, 움직임을 듣기, 그리고 움직임 속에서 듣는 일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소리의 방위를 가늠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약 0.5초라는 시간은, 신경 차원에서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것이 유명한 리벳 실험에서 문제가 되었던, 의지와 행동 사이의 지연 시간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libet’s clock4
피험자는 리벳 시계(libet’s clock)라고 불리는 원형의 시계 모양 도형의 가장자리를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점을 눈으로 좆다가,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점의 위치를 기억하고 이를 보고한다. 실험 결과, 버튼을 누르는 물리적인 행위가 발생하기 직전, 피험자의 뇌에서는 이미 마이크로볼트 단위의 전기적 자극이 발생하고 있었다. 해당 현상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은 이를 Bereitschaftspotential, 즉 준비 전위(Readiness potential)라고 이름붙였다. 자극-반응 시퀀스에서 감지되는 사건 관련 전위는 준비 전위의 포락선에 서서히 상승하는 경향성의 시작구간(onset)을 부여한다.5 평균적으로 준비전위는 행동하기로 마음먹은 의지의 순간보다 약 0.35초 앞섰으며, 그 의지의 행위가 실제 행위로 이어지기까지 또 다른 0.2초가 소요되었다.
위의 실험이 촉발한 자극-반응 수용 실험의 구성 요소를 청각적으로 대체한 실험에서는 주파수의 활공이나 지속시간, 그리고 음계의 패턴이 실험의 변수가 되었다.6 이 실험에서 시계의 분할 단위인 숫자는 일련의 알파벳 시퀀스로 대체되고, 해당 시퀀스의 지속시간 및 패턴이 조작 대상이 된다. 피험자는 소리의 특정한 패턴을 지각한 순간을 ‘지금이야!’라고 보고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시각적인 실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금이라고 느낀 순간과 지금을 선언하는 행위가 시간적으로 유의미하게 결합되기 위해서는 대체로 0.25초 이상의 간격이 필요했다.
현재를 감각하는 것과 그것을 붙드는 일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심원한 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금이라는 감각이 바로 지금 이 현재를 구성하고 있다는 직관과 상충한다. ‘지금’을 보고하는 그 순간이 이미 지연되어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리벳과 더불어 의식에 대한 신경 과정의 우위를 주장했던 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는, 자유 의지란 신경적 사건에 의해 야기되는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결정론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지향과 의지의 어긋남을 나침반과 조타수의 관계에 빗대면서, 나침반이 자아에게 일종의 ‘항로 감지 시스템’을 제공하기 때문에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만약 배가 서쪽으로 가서 암초에 부딪힐 것 같으면, 북쪽으로 돌아 항구로 들어가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나침반이 물리적으로 배를 조종하는 것은 아니다. 바늘은 나침반 케이스 안에서 이리저리 미끄러지며, 실제로는 아무런 조종도 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행동을 의지하는 경험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 간의 관계를 검토하고, 두 가지가 적절하게 일치할 때 "내가 이 일을 의도했다"라고 반응하는 해석 시스템, 즉 항로 감지 메커니즘의 결과로 발생한다. 따라서 이 경험은 어떤 행동이 자신의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때 의식적인 마음에 알리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7
리벳 자신은 자유의지에 대한 자신의 실험이 정신 세계에 대한 통념적인 믿음, 즉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고 그것에 의거하여 행위한다는 믿음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8 따라서 그는 자유를 ‘...하지 않을 자유’로 다시 정의하였다. 실험에 따르면 인간은 의지를 갖기 0.35초 이전 이미 신경적으로 점화된 상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수행하기로 마음먹은 순간과 실제로 수행하기 사이에 존재하는 추가적인 0.2초의 지연 시간 동안 ‘하지 않을 자유’, 즉 부정의 의지를 갖는다. 만약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이 의도한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면, 그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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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하는 귀, 흐르는 걸음, 벌어진 사고> 관객용 어플리케이션 화면. 그래픽 오디오 언어 Puredata 및 전용 에디터를 활용하여 프로그래밍 및 UI 디자인이 가능한 오픈소스 플랫폼 MobMuplat을 이용하여 개발되었다. (사진: 박재형)
다이애나 밴드는 2022년 바이노럴(binaural) 입체 음향으로 소리의 방향을 구조화하는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였다. 본 공연에서 이것은 각 구역별로 나는 소리의 테마 및 청취 지침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형태로 정비되었다. 화면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위를 확인할 수 있는 상단의 나침반, 관객이 서 있는 곳에서 청취 가능한 사운드트랙을 확인할 수 있는 중앙의 텍스트, 그리고 북쪽을 확인할 수 있는 하단의 작은 나침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플리케이션은 gps 데이터와 스마트폰의 자이로스코프가 측정하는 방위값을 통해 사용자가 특정 구역에 진입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음량의 고저로 표현한다. 사운드워크를 진행하는 시간동안 관람객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양, 앞뒤로 움직이게 된다. 관람객은 보행객과 자전거, 반려동물과 오리, 민물고기와 왜가리, 덩굴 식물과 주변의 도로에서 나는 소음에 의해 끊임없이 주의가 분산되고 있는 와중에, 그 공간 안에 물리적으로 결코 존재하지 않고, 또 이어폰 바깥의 다른 이들들과 공유할 수 없는 소리를 찾아 헤맨다. 보이지 않는 소리 대상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주위에서 일어나는 정황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러한 방식의 청취는 전역적이지도, 그렇다고 초첨적지도 않은 것 같다.9 이 공연이 권장하는 양식의 듣기는 차라리 ‘흩어진 듣기’에 가깝다.
약 100여년 전 발터 벤야민이 처음 라디오 방송의 정례 진행을 의뢰받았을 때, 방송국 보도국장은 “라디오 청취자는 거의 항상 개별자이고, 당신은 수천 명을 상대한다고 가정해도 늘 수천 명의 개별자와 연결될 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청취자를 군중으로 여기지 않을 것을 충고했다고 전해진다.10 수신자를 확인하지 못하는 채로 송신하는 중계 행위는 응집력보다는 분산력을 기반으로 하여, 집단성보다는 개별성에 초점을 맞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흩어진 듣기를 조장하는 사운드워크 실천의 목적을 궁구해볼 수 있다.
하나의 소리는 언제나 다른 소리 속에서, 매번 다른 상황과 함께, 차이 나는 방식으로 주의를 끄는 소리의 앞뒤로 들려온다. 때로 존재들은 단순히 공존하기보다는 서로를 견디는 방식으로 장소에 함께한다. 표적음은 왠만해서는 계속해서 이동 중에 있고, 소리를 통한 인식은 언제나 “어떤 것이 감지되거나 또는 감지되지 못한 채 표류할 가능성” 속에 잠겨있다.11 따라서 관람객을 공연장으로 들이는대신 거리로 내보내고, 그들에게 흩어져 듣기를 제안하고, 그러한 종류의 듣기에 수반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할 것 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전하다고 하기에도 어렵다.
하천의 도보 위에서는 밤낮으로 사람들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또 그 반대방향으로 통과시키는 가운데 무수한 차량의 속도와 하중을 견디며 휘돌아가는 내부순환로가 자리하고 있다. 차량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기름을 태워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데, 평균 시속 6km로 이동하고 있는 보행자는 이 차량들의 속도에 비하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다.
“걷기, 특히 표류하거나 산책을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시대의 속도 문화 속에서 일종의 저항이다. 역설적이게도 걷기는 전화나 이메일로부터 안전한 마지막 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걷기는 예술을 생산하는 재료이자, 예술적 거래 방식을 생산하는 재료이기도 하다. 도시는 언제나 사건이 일어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걷기에 대한 이론은 없다. 그저 의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걷기 행위에는 모종의 지혜가 깃들어있다. 그건 일종의 태도인데, 그건 나와 잘 맞는다. 걷기는 당신 시야와 청각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동시에, 여전히 사색에 잠겨 들 수 있는 상태다.”12
벌어진 사건이 나를 변형한다고 생각할 때 나의 행동은 사건이 특정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내가 사건을 특정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부추긴다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정향되는 것은 사태라기보다는 나 자신이다. 준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받고 있고, 받는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주고 있는 이 과정은 피드백이라고 불리운다. 어쩌면 공연자들은 작업과 일상이 상호 피드백을 주고받는 상태를 듣는 귀에 전달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각과 청각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감각술로써 사운드워크는 ‘사건에 대하여’ 실행되기보다는 ‘사건 속에서’ 발생한다.
임희주의 <환삼덩굴 라디오>는 스트리밍 방식으로 일렉트로 라이브 및 합성적 청취자에 관한 책의 구절 읽기, 그리고 자체 제작한 라디오 로고송을 오가는 가운데, 사운드워크의 회차별 진행 현황 및 길 잃은 관람객의 실시간 위치를 제보받아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 모든 것들이 한 바퀴 돌고 꼭 처음은 아닌 지점 어딘가로 되돌아가 이전과는 같지 않은 순서로 다르게 반복하였다. 라디오라는 발상은 물론 환경 속에서의 청취라는 프로젝트의 취지 속에서 환경 그 자체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지 상상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임희주는 자신의 라디오가 필요에 따라, 혹은 내키는 대로 생략할 수 있는, 그냥 계속해서 거기에 있는 일종의 ‘사운드 찌라시’를 상상하였다고 했다.13 선택은 청취자에게 일임된다. 환경적 소리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꺼버리거나 외면할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점에서, 여기에는 두 가지 욕망, 즉 조작할 수 없는 환경이 되고자 하는 동시에 조작할 수 있는 환경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중첩되어 있다.
안민옥의 <궁극귀-노노>는 대조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이 작업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로 자신만의 듣기 도구를 만드는 동명의 워크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나팔모양 깍지와 속칭 후렉시블, 소음 차단용 헤드셋 등을 개조하여 만들어진 듣기 도구 ‘노노’는 그것을 착용한 관람객들에게 특정한 방향의 소리를 채집하고 증폭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노노는 전 구간에서 이어폰 또는 헤드셋을 통해 청취해야하는 공연의 구성 코스 중, 유일하게 맨 귀로 생활 세계의 소리를 들어보기를 제안하는 아날로그 장치이다. 커다란 부피 탓에 약간만 고개를 돌려도 큰 반경으로 회전하는 이 장치들은 관람객이 어느 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또 어떤 방식으로 듣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노노는 관객에게 보여주는 만큼이나, 보고 듣고 있는 관객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준다. 노노는 듣기를 보여주는 도구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노노로 듣고 있는 사람은 소리 사건의 진원지를 동시에 볼 수 없는데,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집중하고 있던 청취의 영역은 이미 다시 머리의 양옆으로 이동해 있기 때문이다. 청취를 향상시키면서도 청각-시각의 동기화는 방해하는 노노는, 우리가 어딘가로 지향할 때 수반하는 감각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야콥 폰 윅스퀼은 친숙한 길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거리를 여러 차례 주파한다면, 우리의 발걸음 속에는 추진 도약(impulse), 즉 충동이 방향 기호처럼 저장된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시각적 특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일한 장소에서 걸음을 멈춘다.14 하나의 장소에 여러번 들락거리면서 익숙한 곳이 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시각적 단서가 아니라 발걸음의 정위를 통해 위치 감각을 갖는다. 설령 우리의 주의력이 흩어져있다고 하더라도, 설령 한 눈을 팔았더라도, 발걸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거리를 주파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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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명의 청취자가 각자의 장소에 흩어진 것 처럼, 한 명 한 명의 청취자들의 주의력은 그 자체로도 이미 흩어져 있다. 시간이 없어서, 정력이 소진되어서, 잊어버려서, 다른 것에 의해 가로채여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어서, 동시에 너무나 많은 다른 일들로 이루어진 무급 가사 노동 때문에, 일상적 청취 경험의 99%는 경사로를 따라 아래로 흘러가다가 하수도로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고갈된다. 그때그때 되는대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한 가지 대상에 온전하게 선택하고 집중할 것을 요구하는 구조에서 지양된다. 선택과 집중은 익사하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우리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한 생존의 양식이다. 선택하고 집중해야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위기의 분위기가 ‘시민성의 앰비언스’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는, 하나의 행위가 마련될 수 있는 상황적 여건을 가능한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높은 윤리관과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기보다 솔직히 못 본 척할 수 없어서 말려들었다고 하는 게 어울리지 않을까. / 그와 더불어 ‘그 상황에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마음 편하다는 매력이 있다. 약속이나 계약 등으로 정해진 일은 이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하지만 ‘그 상황에 한정’된 조치라면, 상황에 따라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해도 괜찮다는 말이 된다. / 관여할까, 아니면 관여하지 않을까.” 15
무라세 다카오는 치매 노인을 돌보는 요양시설을 벗어나 길거리를 헤매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보이는 치매 환자를 실내에 가두는 대신, 시설을 일종의 기지국으로 만든다. 이 기지국은 반경 200M 근방의 거주민들의 주택을 일종의 중계기로 삼는다. 주민들은 길을 헤메는 노인들을 보면 시설에 연락을 취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시설이 주민들에게 수행한 교육의 효과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조치가 사람들의 선의나 윤리적 의식에 기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길 잃은 이를 마주했을 때, 못 본 척하지 못하게 만들고 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선의가 아니라 충동이다. 그게 무슨 충동인지, 그런걸 갖는게 과연 옳고 그른지를 구분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비껴간다. 대부분의 경우, 위기에 처한 누군가에게로 관심이 정향 되는 것이 이른바 선한 영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회고적으로 작성된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윤리는 옳고 그름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게끔 격려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사회성이 어떻게 부수어 열렸는가에 관한 것이다.16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반응은 의식적인 수준 이전에, 신경 차원에서, 그리고 뱃속에서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할 의지를 낼지, 아니면 부정의 자유의지를 발휘할지 미처 결정하지 못한 찰나의 시간 동안 나의 발걸음은 나의 의지를 앞질러 예지 된다. 인식 주체가 의도적인 움직임이라고 여기는 순간에 앞서서 이미 우리를 그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충동은 확장된 목격자-네트워크의 전제 조건이다. 달구어지는 것은 사태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이미 사태와 나와의 거리를 재는 가운데 사태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있는 나의 발걸음이다.
충동으로 말미암은 지향성은 청취와 측정법 간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던져준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사용자를 직접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사용자가 스스로의 움직임을 ‘지금 이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는 자신의 의도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게끔 도와주는 것처럼.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곳 -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가운데, 대상과 몇 걸음 떨어졌는지 헤아리는 셈법 속에서, 나의 발걸음은 비로소 세계를 측정하는 고유한 단위가 된다. 추상화거나 추정하지 않으면서 세계 속의 우리를 감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결코 표준화될 수 없고 측정할 때마다 그 결과가 달라지는 단위.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실존적인 의미보다는 실용적인 의미에서 당신이다.17
없는 것을 발명하는 대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과 사태에 관한 인식론적 전환을 제안하는 사운드워크는 언제나 발견법적으로 정의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교환가치가 있는 소리를 만들거나 듣는다는 효율성의 논리로부터도 벗어나지만, 그러한 논리가 유일한 생존의 양식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각자도생에 대한 믿음의 체계도 위배한다. 일단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이 만들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었음을 뜻한다. 그 감각은 내가 선택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얽혀들고 말려든 우연적인 결과로써 부지불식간에 점화된다. 이렇게 결집한 우리는 벌어진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순간조차 이미 우리의 신경이 사태에 관여하는 준비 전위로 예지 된다는 사실을, 그로써 벌어진 사건으로부터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면제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질로 삼아 이곳에서 당분간 존속한다. 위기의 분위기 속에서,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0.5초의 사이렌 네트워크 속에서.
1.이 표현은 사운드워크 ≪향하는 귀, 흐르는 걸음, 벌어진 사고≫의 기획 회의록(2024.9.19)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집중호우가 왔을 때 청둥오리가 밖으로 나왔고, 게도 나오고. 수위가 올라가니까 사이렌이 울린다. 내려갈 때 무서움. 그랬을 때 만나는 지점이 생긴다. 긴급상황이라던지 전복되는 것들이 있다. 사이렌 네트워크. 가만히 있을 때도 앰뷸런스 지나가는 소리. 그런 소리들을 듣는 짧은 시퀀스[..]”↩
2. “소리(sound)로서, 소리환경(ambience)는 사람들을 통해서 운동이 일어나는 분위기와 공간을 마련해준다. [..]소리의 확산에 의해 유도되는 분위기인 그것은 가장자리 없는 서식지이자 부드러운 답보상태이다.” 『잔인한 낙관』. 로렌 벌렌트. 윤조원, 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24. 415~7쪽↩
3. 심리학적으롤 점화(點火,priming)는 하나의 자극에 노출됨으로써 의식적인 지침이나 의도 없이 후속 자극에 대한 반응이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한다. 자극에 뒤따르는 지각, 연상, 반복, 긍정, 부정, 감정, 의미 또는 개념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출처: en.wikipedia.org/wiki/Priming_(psychology)↩
4. Lau HC, Rogers RD, Passingham RE. Manipulating the experienced onset of intention after action execution. J Cogn Neurosci. 2007 Jan;19(1):81-90. doi: 10.1162/jocn.2007.19.1.81.↩
5. 사건 관련 전위(event-related potential)는 뇌에서 어떠한 감각적, 인지적 자극이나 운동 등의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전위차로 정의된다. 리벳 실험에서는 피험자가 시계의 눈금을 보고 손가락을 움직이기로 결심했다고 여기는 순간에 약 0.5초 앞서 먼저 나타나는 뇌파의 변화가 이에 해당한다.↩
6. Muth FV, Wirth R, Kunde W. Temporal binding past the Libet clock: testing design factors for an auditory timer. Behav Res Methods. 2021 Jun;53(3):1322-1341. doi: 10.3758/s13428-020-01474-5.↩
7. The Illusion of Conscious Will. Daniel M. Wegner. MIT Press. 2003. 301-2쪽. 다음 링크에서 재인용. informationphilosopher.com/freedom/libet_experiments.html↩
8. 해당 논의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였다. 『신경과학철학』. 이영의. 아카넷. 2021. 362쪽↩
9. 전역적 듣기(global listening)와 초점적 듣기(focal listening)의 구분은 폴린 올리베로스가 Quantum Listening(Pauline Oliveros. Ignota books. 2022)에서 제안한 구분을 따른 것이다.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고 우리에게 도달하는 모든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전역적 청취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항구적인 대기 상태로 머무르는 상태다. 작곡가 윌리엄 오즈본은 이와 관련하여 전역적 듣기가 실상 무수한 초점적 듣기의 집합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더 많은 논의는 다음을 참고. osborne-conant.org/listening.htm↩
10. 『라디오와 매체』. 발터 벤야민. 고지현 편역. 현실문화. 2021. 39~40쪽↩
11. 『투명한 힘』. 캐슬린 스튜어트. 신해경 옮김. 밤의 책. 2022. 205쪽.↩
12. Francis Alÿs: The Politics of Rehearsal. Russell Ferguson. Hammer Museum, Los Angeles. 2007. 63쪽↩
13. 기획 회의록(2024.9.29) 중.↩
14.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야콥 폰 윅스퀼. 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12. 88쪽↩
15. 『돌봄, 동기화, 자유』. 무라세 다카오. 다다서재. 2024. 204~5쪽↩
16. 『정동정치』. 브라이언 마수미.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8. 37쪽↩
17. 다이애나밴드, <나는 너야>(2022) 작업 노트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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