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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일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한다. 그 이유는 내가 <향하는 귀,
흐르는 걸음, 벌어진 사고> 사운드 워크 공연을 관극하며 언어화의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 다시 말하자면 몹시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공연이 선사하는
시공간에 그저 텅 빈 뇌와 몸을 맡겼으며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 이후 리뷰를 써달라는
느닷없는 제안에 선뜻 응했던 스스로의 결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꽤 재미있는 사건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듣기란 언제나
급습당하는 일에 가깝고, 지금 내가 쓰는 이 글도 일종의 급습의 결과물이므로 사운드 워크
공연과 리뷰의 형식이 느슨하게나마 유사성을 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리를 들으며 상연되는 이미지를 떠올리듯이, 그러한 유사성에 의해 공연에
참여하지 않은 이 글의 독자가 공연의 경험을 보다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경험을
언어화하는 일이 언제나 숭숭 뚫린 구멍들과 그 구멍으로 드러나는 왜곡된 풍경을 대상의 일부로
환원하는 사기꾼 같은 행위를 수반하더라도 대체로는 일말의 진실을 품게 되기 마련인데, 그것은
닿을 수 없음에도 대상을 향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글의
예비된 오류들은 불완전한 기억에 기반하여 서술된, 최선의 진실을 향하고자 하는 의지의 잉여적
부산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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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보틀팩토리 1층에 모여든 수상한 무리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공연은 시작되었다.
날씨가 무척 좋았고 그들(공연 관계자들)이 내게 팔목에 묶는 형광초록색 끈을 건네주었다.
보이스카우트 같잖아? 라고 생각하며 조금 신이 나기 시작했다. 큰 테이블에 앉아 어플리케이션
사용 설명을 들었다. 어플리케이션은 다마고치를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디자인이라는 인상을 주었는데 듣기의 환경을 제시해주는 것 같았고 믿음직스러웠다. 간단한
약도와 설명서 그리고 초코바를 건네받았다. 일전에 안내받은 바에 따라 100% 완충해 온
휴대폰과 헤드폰을 착용하고 동시간 산책자들과 함께 보틀팩토리를 나섰다. 가을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지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듣게 될지 모르지만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마음은 처음 가져보는 것 같군, 본격적인 듣기를 시작하기 전 새로운 마음을
하나 경험해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공연이 벌써 아름답게 느껴졌다.
홍제천은 익숙한 공간이었다. 어느 밤에는 수면에 비치는 빛의 반짝임을 카메라로 찍어보기도
했고 한 구간에서는 평소보다 진한 물비린내를 맡기도 했으며 때로는 함께 걷던 누군가와 다퉜고
지나가던 말티즈와 인사했고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낀 채 외부 소음을 차단하며 생각에
집중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공연에 진입한 나의 몸은 홍제천을 따라 걸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누적된 지층으로서 새로운 기억의 겹을 만들며 걷고 있었다. 이 겹은 소리로 똘똘 뭉쳐 있어
예외적으로 청각적 경험의 함량이 높은, 성분이 달라 눈에 띄는 하나의 고유한 층이 되겠군, 이런
생각들을 함께 했던 것 같고 머리를 쓰니 당이 떨어져 초코바를 베어 물었다. 초코바 역시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무척 맛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같은 소리를 들을까? 고막이 진동하는 떨림을 인식 가능한 소리로
변조하는 신체 작용은 다른 몸에서도 내 몸에서와 같은 결과물을 생성할까? 이를 테면 내가
머릿속에서 ‘쿵’이라고 듣는 소리를 누군가는 ‘쾅’이라고 들을 수도 있는 걸까? 영원히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산책자들은 다함께 나무 밑에 서서 소리를 들었다. 뽕짝 같은 음악이
어플리케이션과 연결된 나의 블루투스 헤드폰에서 흘러나왔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행인들의 걸음소리, 물소리와 차소리가 눌러쓴 헤드폰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내가 들으려는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리가 뒤섞이고 있었고 눈앞에는 나처럼 열심히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종의 연대감을 느끼며 들리는 소리의 초점을 이리저리 옮겨보는
나만의 놀이를 했다. 소리가 나를 침범하거나 내가 소리를 침범하면서 서로를 탐색하고 뒤섞이는
중이었다. 헤드폰에서 들리는 소리는 장소를 벗어나면 잦아들었다. 날씨가 경험되는 방식과
같았다. 그래서 작업의 제목이 ‘날씨 같은 소리’인 걸까?
여하튼 날씨는 좋았고 소리도 좋았다. 뇌절트랙은 (순전히 나의 뇌절이지만) 과거의
홍제천에서 녹음된 소리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걸으며 소리를 통해 과거와 함께할 수
있었다. 뛰는 사람, 걷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오리, 물결, 구름이 만드는 장면이 과거의
소리에 의해 더빙되고 있었다. 현재의 움직임이 발생시키는 소리들이 헤드폰을 쓴 귀 안으로
흘러들어와 과거의 소리를 방해하거나 환영하는 방식으로 함께해주었다. 과거와 소리와 나,
우리는 함께 미래로 가는 중이었다. 과거의 소리로 인해 상상된 과거의 장면들은 보이는 풍경을
한 겹 덧칠하거나 벗겨내 상상 쪽으로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상상된 과거의 홍제천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형상이었다. 다른 날씨, 다른 사람, 다른 움직임이 있었겠지만
천변이라는 것은 왜인지 원형적인 인상을 갖고 있기에 그로부터 크게 변주되지 않는 듯했다.
소리를 매개하여 직접 겪지 않은 과거적 순간을 상상하는 일은 그러므로 글쓰기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글쓰기 역시 기호가 지시하는 원형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새로운 변형을
생산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홍제천’이라고 쓸 때 쓰는 이의 머릿속에는 당연하게도
‘홍제천’의 인상이 떠오른다. 유심히 듣는 일과 쓰는 일은 결과적으로 같은 비물질적 경험을
생산할지도 몰랐다.
내 몸이 하나의 거대한 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정말로 거대한 귀
‘궁극의 귀 노노’가 나타났다. (‘노노’ 이름의 어원이 받은 종이에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잃어버려
알 수 없다……) 노노 앞에서 나는 조금 동요했는데 노노의 안내자 안민옥이 나의 오랜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귀 노노를 들고 서 있는 기다란 안민옥에게 노노와 노노의 친구들을
건네받았다. 안민옥을 처음 만난 공간이 홍제천이 아니라 프랑스 파리였기 때문에 나는 노노의
입구를 홍제천의 풀과 물을 비롯해 이곳저곳에 갖다 대는 동안 파리의 풍경을, 우중충한 그곳의
가을을 떠올리게 되었다. 센 강이 흐르는 소리와 홍제천이 흐르는 소리는 어떻게 다를까.
소리만으로 우리는 두 개의 물길을 구분할 수 있을까. 노노는 궁극의 귀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능이 뛰어났다. 노노를 통해 ‘소리가 커진다’라는 말이 완벽한 시각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이를 테면 풀숲에 노노의 입구를 갖다 댈 때에는 풀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정말 크고 선명하게 들리는 나머지 눈앞에 스무 배쯤 클로즈업 된 풀잎들이 들이닥치는 듯했다.
노노와 함께하는 시간은 짧았다. 마음 같아서는 노노와 함께 바다도 가고 우주도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기에 노노를 반납했다. 행인 몇 명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다 대체
무엇을 하는 중인지, 자신들도 노노를 착용해볼 수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안민옥은 공연에 대해
능숙하게 설명한 뒤 거절했다. 노노를 착용한 스스로의 사진을 찍어두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언젠가 노노 박물관이 생겨서 노노를 자유롭게 탈착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아니면 기성품
노노를 구매하여 집에 하나 두어도 좋겠다. 잘 듣고 싶은 소리가 있을 때마다 노노의 힘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산책자들은 붉은 우레탄 위를 되돌아가 다리를 건넜다. 이쯤부터 어플리케이션에 연동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라디오는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듯했다.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의
목소리라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된다. 내가 걷는 동안 두 명의 발화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떠오르지 않지만 그들이 나를 안심시켰으며 덕분에 돌아가는 길이 한결 편안했다는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내가 정체 모를 탐험을 지속하는 동안 누군가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발성의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리는 움직임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며
움직임의 소리와 이미지를 포착하는 청취자이자 목격자로서의 나 역시 살아있기에, 살아있음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실감에 기대어 걸을 수 있었다. 태어나서 들어온 수많은 목소리들, 어린
나를 달래고 어르는 소리,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소리, 자장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소리, 거리의 무관한 행인들의 대화, 울음소리, 웃음소리, 삶을 채우며 흐르는
수많은 목소리들 덕분에 지금 나의 몸이 이 길을 걸을 수 있다.
라디오를 들으며 도착한 미학관에는 들었던 소리들이 누적되어 흐르고 있었다. 내게 들리는
소리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초록색 조형물들 – 조각난 인조 잔디들의 더미 같은 것을 바라보았다.
귀여운 동물 같았다. 저 동물의 영혼은 왜인지 영혼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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