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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쏟아지는 오후, 당신은 카페에 들어섭니다. 손님은 당신 혼자이며, 조용한 주인장은 커피를 내리고 있습니다. 지친 당신은 나무로 만들어진 바 테이블에 엎드려 깊은숨을 내쉽니다. 말없이 그 자세를 유지하면 소리가 들려옵니다. 거센 빗소리,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 그리고 진동을 느낍니다. 나무 테이블과 맞닿은 당신의 관자놀이를 통해서 진동이 들립니다. 테이블은 낮고 간헐적으로 진동을 만들어냅니다. 그때 당신은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고, 위로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분위기가 좋다, 읊조릴 수도 있습니다.
분위기 좋다. 이 말을 읊조리기 위해 하나의 풍경을 적는다. 우리는 좋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공간에서 이 말을 사용하곤 한다. 나에게 있어 분위기가 좋다, 라는 말 안에 소리가 포함되어 있다. 마치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소리는 어떤 공간과 시절의 풍경으로 이동시켜주는 접속 장치이다.
  빗소리, 나무 테이블의 진동까지. 사물이 내는 소곤거림을 언제 목격할 수 있는가? 인간이 말을 멈춰야 한다. 사물의 소곤거림에는 대단한 메시지도, 조언도 없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대답해줄 의무가 없이 듣기만 해도 된다. 나는 사물이 자아내는 소란 속에서 평온을 느낀다. 이런 일상적인 소리는 전시장에 입장하면 변화한다. 소리는 메시지를 지니는 매체가 된다. 전시장에서 소리 내는 사물을 발견하면, 진리를 발견해야만 할 것만 같다. 전시장에서의 소리는 무거워진다.
  그러나 사물의 말하기와 에너지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시가 있다. 전시장에서 '나'는 흐려지고 사물의 소곤거림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풍경을 보는 사람이었다가 동시에 풍경이 된다. 위계가 사라진다. 위 전시를 언급하며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는 공진화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겠다는 선언이 위선처럼 느껴지지만 시도한다. '말한다' 대신에 '분위기'와 '발화'라는 단어로 우회하며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빗겨나 사물 그 자체의 에너지가 건네는 힘을 느껴보고자 한다.
  다이애나밴드의 《점, 곁에서 말하는 점들》에서 사물들은 '발화'한다고 표현된다. 다이애나밴드가 자신들의 사물들을 '발화'한다고 표현하는 점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위 단어가 주는 인상을 자의적으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일방적으로 말하기'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지닌 에너지를 태우면서 무언가를 보여주기'이다. 전시장의 사물들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표출한다. 전시장에 놓여 있는 플라스틱 깔때기, 탁구공은 물리적 힘을 전달받아 소리 낸다. 이것은 사물에 마법 같은 생명력을 불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힘의 스위치를 눌러주는 방식이다. 이 사물들은 '나'로부터 에너지를 받아서 소리를 내고 있지 않다. 그들은 서로의 에너지를 느끼며 대화한다. 깜빡, 핀 조명이 켜지는 것처럼 그들은 에너지를 발화한다.
  전시장에서 '나'는 대화에 참여하는 대상자가 아니라 바라보는 객체이다. 소리는 다가오고, 불규칙하게 흘러간다. 앉아서 들을 때도 있으며 산책하듯 걸으며 들을 때도 있다. 그러면 다른 신체를 잠시 마주하게 된다. 전시장에서 소리를 듣고 있는 인간인 '나'는 공간에 떠도는 발화에 대답할 필요도, 뜻을 분석할 요구도 받지 않는다. 그저 소리가 더 멀리 퍼져나가기 위해 위치한 소리굽쇠처럼 그 자리에 서 있다.나의 몸은 소리를 제작하기 위한 소리 전달판이 된다. 그로 인해 '나'의 신체도 분위기가 되어 공간에 동참한다.
  전시장에 배치된 사물들이 내뿜는 에너지는 제인 베넷(Jane Bennett)이 『생동하는 물질』에서 말하는 사물들의 기세(shi)1 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기세는 "사물들의 특정한 배열에 내재한 양식, 에너지, 활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해진 양식이 아니라 유동하고 개방적이다. 발화하는 사물들은 기세를 지녔기에 흐르고 변화한다. 전시장에서 마주한 소리는 반복되는 소리처럼 들려도 그렇지 않다. 소리는 이별이 예약된 약속이다. 정확한 원전은 다음 소리에 의해서 흐려지고 흩어지며 머문 흔적만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가 그 공간에서 지니고 떠날 수 있는 것은 분위기뿐이다. 일시적으로 내가 다른 존재와 감정적 맞닿음이 있었다는 기억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분위기가 좋다'라는 말로 돌아가 보자. 분위기가 좋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 말 뒤에 침묵이 뒤따라온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가 있다. 대화로 어떤 중간 지점을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화는 무한히 지속될 수 없다. 대화가 시작되면 기필코 끝나야 한다. 이것은 소리가 들려오면 이내 사라지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우리가 분위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집합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하나의 메시지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흐르는지 느끼는 일이다. 일시적으로 연결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위기가 좋다는 것을 공진화라고 다시쓰기 한다면 너무 많은 것을 건너뛰고 마는 것일까? 공진화의 주요한 점은 '흐른다'에 있다.
  전시장 기둥에 비스듬히 기댄 '나'는 에너지를 감지하고, 침묵한다. 간혹 오만한 한 인간으로서 대단한 어떤 말을 선언해야 할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다이애나밴드가 보낸 초대에 의해 나는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을 다이애나밴드식으로 적어보자면 '곁에서 말하기'이다. 곁에서 말한다는 것은 다정한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소리가 사라지고 변화하는 전시장에서 떠나간 것과 그럼에도 남은 것들을 보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 곁에 무엇이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느껴도 그것을 정확하게 행동할 수 없다. 사랑할 때 정확하게 사랑하지 못하고 실패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쓰기 할수록 미끄러지는 것 사이에서 유일하게 받아 적을 수 있는 것은 분위기이다. 그때 내 곁에서 말하던 분위기를 기억하자. 정확하게 받아 적지 못하더라도 그 인근에서 서성일 수는 있다. 비스듬히 기둥에 기대어 앉아 속삭이자. 아, 분위기 좋다.
1.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역, 서울: 현실문화, 2020,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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