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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생태계, 사물의 하모니1


유은순


1.
다이애나밴드는 다섯 번째 개인전 <루트에 대한, 대화>에서 SeMA 창고에 다양한 모양새를 가진 사물들이 상호작용하는 일시적인 환경을 구축한다. 사물이 가진 통신시스템은 각자가 가진 소리-언어를 다른 사물들에 보내고 거기에 응답하거나 응답하지 않도록 프로그래밍 된다. 작가는 전시장이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 구축된 사물들의 생태계를 월드에너지라고 지칭한다.

직사각형의 4전시실에는 서로 다른 모양새를 가지지만 모두 다 같은 이름, 낚시찌라고 불리는 사물이 아래로 위로, 휭휭거리며 돌거나 튕기면서 서로 소통하며 군집 생태계를 이룬다. 더욱 널찍한 정방형의 5전시실에서는 파랗고, 노랗고, 길쭉하고, 넓적하고, 동그랗게 말려 있는 갖가지 사물들이 도르르 구르거나 멈추거나 휭휭거리거나 쿵쾅거리거나 번쩍거리며 서로 대화를 나누며 고유의 생태계를 구성한다.

2.
지난 개인전 <프린스의 방에서의 1과 128분의 12초>(2019)와 이번 개인전 <루트에 대한, 대화>는 전시라는 시공간에 구축된 사물들의 네트워크에 주목한다. 네트워크에 대한 관심은 다이애나밴드가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진행한 일련의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의 문제의식이 연장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작가는 사물보다 사람들의 관계에 주목하였고, 전시나 프로젝트마다 일시적으로 공동체를 결성하였다가 흩어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효율성, 유용성 중심의 성장을 앞세우는 현대사회에 예술로써 저항하기 위한 시도였다.

“우리는 이 연결이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길 원했고, 정치 세력화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어요. 그런 것보단, 마치 세포들이 증식하거나,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것처럼 '연결'들이 순간적으로 확산되어서 '거대한 몸'이 만들어지는 것-그 일시적인 '연결된 몸'의 형성과 작동에 참여하는 경험을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원했어요. (…) 그 커다란 몸이 드러나서, 원래부터 큰 영향력과 ‘몸’을 지닌 위협적인 존재들-자본, 기업, 정부, 질주하는 대형 트럭, 횡단보도에서 멈추지 않는 자동차 같은 존재자들이 우리들을 보게 되고, 멈춰 서게 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도구와 방법을 개발하고 함께 연습하는 것이 주안점이었던 것 같아요.”

3.
소리는 공동체의 매개체로써,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소리를 만들었다. 안산 일대를 함께 걸으며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소리를 발생시키는 <시티즌밴드>(2016),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체이면서도 홀로 있는 사람들의 공동 행동에 대한 구상 <일어서고 주저앉은 입장들>(2017), 개인의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일시적인 소리 공동체를 만들어보는 <광장연습>(2017, 백남준 아트센터) 등이 대표적이다.

다이애나밴드에게 소리는 소리 자체도 중요하지만 소리를 발생시키는 울림통으로서의 신체가 중요하다. 유체의 진동을 통해 생성되는 소리는 신체가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한에서 생성되며 그 순간 이후에는 휘발된다는 점에서 다이애나밴드가 추구하는 –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가 흩어지는 – 공동체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다. 한편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소리가 난다는 것은 소리가 들리고 있는 곳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신호이므로 소리의 주고받음은 보이지 않는 연결망을 보이지 않는 방식대로 구성하는 주요한 매체가 된다. 소리는 무언가의 발생을 암시하지만 언어로 발화되지는 않는다. 언어를 비껴가는 가능성은 신체를 경유한 소리들의 부닥침으로 현실화된다.

“소리는 떨림에서 비롯되는데요. 미세하게 떨리거나 거칠게 떨리거나, 맞닿은 지점에서 소리가 시작되지요. 소리의 존재가 연결과 관계를 전제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지만, 제 주변은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들을 수 없는 소리까지 포함한다면 셀 수 없는 소리들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지요. 소리, 혹은 떨림을 가진 존재들을 떠올리면, 거의 모든 존재를 포함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문화나 언어를 넘어서 공감과 이해가 가능한 연결방식으로 소리가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4.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프로젝트 <사물행진>부터 작가의 관심이 인간에서 사물로 점차 확장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작가는 인간이 효율적이고 간편한 삶을 위해 수단이자 도구로 제작하는 인공물로부터 쓸모를 제거하고 무쓸모로부터 다시 관계를 맺기를 제안한다. 북치고 보행기, 핑퐁 수레, 피아노 보행기, 부케 마이크, 쌍마이크 라이트, 링겔 확성기, 크게 말해 조명 등 사물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하고 이를 ‘사물친구’라고 명명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객체는 도구적 존재자로서 인간이 대상에게 쓸모를 부여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인공적으로 제작된 사물이든, 자연에서 습득한 재료이든 인간이 그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한에서만 그 대상은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객체의 의미는 주체에 의해서만 획득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발생하는 사물의 사건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사물행진>은 사물이 고안되었을 당시의 쓸모, 예컨대 탬버린은 짤랑짤랑 소리를 내기 위해서, 줄자는 길이를 재기 위해서, 조명은 어두운 곳을 밝히기 위해서라는 기존의 목적을 뒤집고 다른 쓸모를 획득한다. 이는 비생산적인 쓸모라는 점에서 반자본주의적이고 예술적인 관계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목적적이라 할지라도, 예컨대 보행기가 북을 치고, 조명이 탬버린을 치고, 줄자가 길이에 따라 소리를 만들어낼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부여한 쓸모이자 인간에 의한 자의적인 관계 형성이라는 점에서 사물은 여전히 도구적 존재자로 남는다.

5.
개인전 <프린스의 방에서의 1과 128분의 12초>는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사물과 사물의 관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는 전시이다. 사물 간의 ‘네트워크’에 방점이 맞춰지면서 도구적 존재자였던 사물은 주체와 객체 간의 위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전시는 프린스라는 어떤 존재가 머무는 공간을 구현한다. 프린스가 사용할 법한 20여 개의 사물은 프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눈다. 무선통신으로 연결된 비가시적인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는 움직임과 소리로 가시화된다. 관람객은 예상치 못한 발생들과 맞닥뜨리면서 작품을 조망하는 위치에서 안전하게 관람하기보다 목격자로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 <토이스토리>를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라면, 프린스-인간이 떠난 방에서 인간이 부여한 목적에서 벗어난 비인간-존재들의 대화는 사뭇 유쾌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되지 않는 소음과 예상할 수 없는 움직임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있어 불쾌감을 자아낼 수도 있다. 두 상반된 감정은 모두 인간을 소외시킨 자체의 환경에 반응하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사물들은 프린스의 소유물이자 권력이고 능력이에요. 또한, 사물들의 입장에서도 프린스와 연결되고 그에게 이용되는 것은 그의 '방'에 계속해서 거주할 수 있게 하는 전제 조건인 것이죠. 하지만, '프린스의 방'에는 흔들의자와 거울과 옷걸이, 열쇠고리 이런 것들이 있긴 하지만, 흔들의자는 저절로 끄떡끄떡 이고 옷걸이는 소매를 흔들면 소리가 나게 되어있고, 열쇠고리는 언젠가 열쇠를 바닥에 떨어뜨리곤 해요. 즉, 이 방은 '프린스'가 자리를 뜬 빈 방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프린스'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는 환경-현실의 숨겨진 이면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기생적인(parasitic) 존재양식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프린스의 막강한 권력은 그가 일국의 왕자여서라기 보다는,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프린스가 사물들을 '도구화'한다는 데에서 오는 것이구요. 이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누구도 '프린스'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는 않죠.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기생적인 존재성을 삭제하거나 포기하게 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들은 단지 그들의 세계-네트워크 안의 사회 속에서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잘 지내고 있어요. '프린스'-인간들은 그 세계 속에 결코 개입할 수 없지만 말이에요.”

6.
이번 개인전 <루트에 대한, 대화>에서 다이애나밴드는 사물들의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보다 방점을 둔다. 두 전시 모두 사물에 통신시스템을 심어 자체적인 응답이 가능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점, 관계적 미학에 기반하여 관객을 작품을 함께 만드는 협업자의 위치에 있던 지난 프로젝트와는 달리 관객을 관찰자의 위치로 돌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전시와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다르다. 첫 번째로 사물들의 네트워크에 메타적으로 위치하는 인간-프린스를 삭제한다.

“일단 사물의 존재양식을 바라보는 두개의 관점, 도구(tool)와 기생물(parasite)의 위계적인 관계에 대한 재설정이에요. '프린스의 방'에서는 기생의 세계가 도구 세계의 이면(the other side)이라고는 하지만, 어딘가 부차적인 느낌을 남겨두고 있었는데요. 사실은 대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위상의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 이번 전시 <루트에 대한, 대화>에서는 '프린스의 방'에서 프린스의 존재가 사라지고, 사물의 '숲'이 우선적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들-인간들이 그 숲에 접촉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으로 작업의 방향이 사뭇 달라지게 된 것이죠.”

두 번째로 사물들의 소리는 소리를 고안 혹은 작곡하여 디지털로 심는 방식이 아니라, 재질, 크기, 위치 등 사물이 가진 성질을 바탕으로 소리를 최대한 아날로그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사람들의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 작가는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기술집약적인 스마트폰을 자주 활용하였다. 대표적으로 <손에 폰잡고>(2015)는 스마트폰을 “상호반응하는 소리발생기로 변용”시키는 한편, 다른 재료를 활용하여 “제3의 사물”로 만들기도 하였다. 여기서 소리는 스마트폰으로 생성되는 디지털 소리이며 그만큼 많은 변용이 가능했다. 관객은 부가적으로 덧붙인 것을 통해 소리를 다르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

7.
<루트에 대한, 대화>에서 다이애나밴드는 인간적 관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작가로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최대한 축소하였다. 이는 사물에 인위적인 사운드를 덧입히지 않고 사물의 울림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작가는 이를 사물의 잠재태를 현실화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한다. 작가는 사물마다 여러 가지 소리를 고안하였는데 그러면서도 특정한 감정을 부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사물에 감정을 부여하는 것은 여전히 너무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비인간-존재에게 소리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고, 서로 응답을 주고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과 사물들 전체가 관여하는 가상의 에너지, ‘월드 에너지’를 고안한 후에 작가는 멀찍이 떨어져 관객과 마찬가지로 관찰자의 위치에 선다.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관계하지는 않지만, '환경' 혹은 어떤 '월드'를 공유하면서 주고받는 비-언어적인 대화. 혹은 분위기. 그건 일단은 '에너지'라고 불러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물리세계의 감각 가능한 에너지들-열에너지, 운동에너지, 음압, 기압 이런 것들이 아닌, ‘미지의 에너지’임을 여전히 강조하고 싶어서, '월드-' 라는 접두사를 붙여서 거칠게 낯설음을 강요해보자고 생각했죠.”

객체를 대상이 아닌 주체로 바라보고자 하는 관점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자연물이든 인공물이든 모든 것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신앙인 애니미즘은 일종의 집단무의식처럼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애니미즘은 사물을 인간을 넘어서서 인간의 삶을 주관하거나 개입하는 초자연적 존재로 상정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바람을 투영한 존재는 신비주의를 강화하는 기재가 되며 객체를 여전히 주체와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다이애나밴드는 사물을 관찰하면서 인간적인 관점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물 자체의 성질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자 한다. 이는 전시 기간 중 실행된 퍼포먼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다함과 다이애나밴드가 선보인 퍼포먼스는 물통, 손전등, 풍선, 호일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물들을 다시 낯설게 만들고 소리와 형태를 재발견하고 객체의 성질을 따라하는 움직임과 소리를 만들어냈다. 기존의 관습적 이해에서 벗어나는 한편 사물과 가까워지는 몸짓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자 하였다.

“고장 난 환풍구에서 리드미컬하게 변형되며 소리가 들려올 때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몰라 어떤 존재의 소리인지 궁금해하며 가만히 듣고 있을 때가 있어요. 가만히 듣다보면, 외부 환경에 반응하여 끊임없이 변하는 소리는 생명력이 있어요. 몸이 있기 전에 그 존재가 소리로 저에게 닿는다는 걸 느낍니다. 소리와 존재 그리고 몸 사이에 물리적이지만, 현상적이고 기호적인 작용이 존재 자체적으로 발생하고, 존재들의 관계 안에서도 발생하는 것 같아요.”

8.
이러한 다이애나밴드의 노력은 객체지향존재론을 예술의 영역에서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객체지향존재론은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영향을 받아 그레이엄 하먼, 레비 R. 브라이언트 등에 의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사물을 동등한 혹은 독립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간주하면서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구분을 없애고 주체와 객체의 동등한 지위를 상정하기 위해 행위자, 기계 등의 개념을 도입하여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철학자마다 객체의 범위, 정의, 관계, 양상 등은 다르지만 데카르트부터 이어져 내려온 서구의 이원론을 재고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사물들이 내는 소리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소음에 불과하지만 서로 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장으로 이해했을 때 그것은 언어가 되고 대화가 된다. 관람객은 네트워크의 외부자로써 대화의 장에 포섭되지는 못하지만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 귀 기울임이 필요해진다. 요컨대 사물들의 네트워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에만 단순히 그치지 않고 사물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된다. 그 결론은 인식의 전환이자 언어의 재구축이다. 주체의 도구로써 사물을 대하지 않고 사물을 나와 같은 위계의 존재자로 인식하게 되면 용례가, 동사가 변하게 된다. 일례로 나는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선반에 올려진 돌멩이를 보고서는 그것 또한 대화를 하는 비인간-존재인지 고민하였고 전시장 바깥의 사물들이 일으키는 소음들이 전시장 내의 사물들에 미칠 영향과 대화를 상상하였다. 그리고 다이애나밴드에게 사물의 ‘선정’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다가 문득, 사물을 ‘초청’한 방식을 묻게 되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언제나 인간 중심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영원히 비인간-존재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하고자 하는 ‘지향성’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더욱 다층적인 관점에서 비인간-존재를, 환경을,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을 가득 채운 존재자들이 기술적 대상이든 그렇지 않든 서로가 서로에게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세포 덩어리가 생존을 달성하고, 의식을 개발했으며, 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인간들의 연결된 몸'에는 여전히 관심이 있어요. 이 작업은 참 재미있는 구석이 있거든요. 그런데, 앞으로는 뭐랄까, 그 '커다란 몸'의 모습 속에 그 연결을 지어주는 네트워크적 존재자들-사물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났으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들의 차분하고 견고하고 단호한 존재성은 우리가 형성한 몸에게 그런 인상을 더해줄 것 같아서 기대가 되요.”

0.
신원정, 이두호 2인으로 구성된 콜렉티브인 다이애나밴드는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창작자가 전시마다 일시적인 합일점을 찾아내고 다름의 격차 속에서 다양한 관계를 구축해나간다. 따라서 다이애나밴드는 두 명으로 구성된 콜렉티브라는 사실보다 두 다이애나 사이의 진동 속에서 만들어내는 관계(band)에 보다 방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는 작업방식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다.




1. 이 글에서 따옴표로 서술된 글은 필자가 전시에 대해 다이애나밴드에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을 받은 것을 편집하여 실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