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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 물은 인간이 보지 못한 땅의 기억을 매개하며 흘러왔다. 비가 내리면 제주의 마른 하천을 채우다 돌 틈으로 삽시간에 사라지고 지표면의 숨구멍인 숨골 안으로 스며들었다가 동굴의 용암 벽을 따라 떨어지는 물, 화산섬의 지층 속에 긴 시간 압축되었다가 해안가 곳곳에서 용천수로 솟구치는 물은 끊임없이 운동하며 어딘가 새로운 자국을 남긴다.
갈증이라는 신체적 감각은 우리 몸의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매번 상기시키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지하수의 존재는 플라스틱 병에 담겨 우리 몸에 흡수될 때가 되어서야 물질적 가치로 환산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땅 아래 물방울 파편들이 만들어 내는 미세한 진동은 어둠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고 있지만 인간의 가청범위에서 멀어진 그 소리는 쉽게 잊힌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회복과 재건의 시간을 거쳐 오며 우리는 인간이 지구라는 한 장소에서 (비)인간 존재들과 상호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지구 저편의 전쟁을 잊고, 기후 위기의 징후 속에서도 공멸의 미래를 잊지만, 반세기의 강요된 침묵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제주 4.3의 증언에서 어떤 희미한 진동도 파동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태도는 이렇듯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로 이어진다.
≪음소거된 물의 소리: 진동의 걸음≫ 전시의 참여 작가인 다이애나 밴드(신원정, 이두호), 오로민경과 김그레이스는 약 6개월의 시간 동안 제주 전역의 건천과 동굴, 숨골을 찾아 현장 연구를 진행하였다. ‘땅 밑 물의 소리를 우리는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다양한 신체 감각과 기계를 매개체로 물과 연결되기를 시도하였다. 물의 환경에 우리 몸이 다다르기까지의 여정은 존재의 ‘있음’에 대한 믿음 속에서 진동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진동의 걸음은 자신 안에서도,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도, 세계 안에서도 여러 (비)인간 존재들과의 마주침과 부딪힘 속에서 멈추지 않고 흐른다. 상부에서 흐르는 물과 응축된 지하수가 솟아오르며 만나는 산지천에서의 전시는 이런 진동과 흐름의 움직임을 펼치기에 지정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듣는 몸이 되고자 들리는 몸들과 함께 행진했던 우리의 걸음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용천수를 향해 하루에도 수차례 산지천을 올랐던 제주 여성들의 찰랑이던 물허벅의 걸음에서, 세월호 10주기를 기억하는 바다 곁의 걸음으로,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새로운 집을 만들어가는 활동가의 걸음으로, 경계와 장벽을 스며들어 넘나드는 몸들의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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