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향성
내가 말하며 듣는 목소리와 녹음된 나의 목소리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녹음된 소리가 분명 나의 목소리라고 알지만 영 적응하기 어려운 어색함이 있다. 이는 대부분 불쾌한 감정을 동반한다. 내 몸에서 울리는 소리가 제거된 버전이어서 그럴까? 애석하게도 나는 조음기관이 덜 발달한 것일까? 또는 덜 개발한 것일까? 어쨌든 나는 스페인어의 아르르르하는 R 발음도 내지 못하며, 기본적으로 말을 하다 보면 입에 침이 고이며, 소리가 먹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건 이래서 안 돼, 저건 저래서 안 돼’하며 핑계를 대는 내게 조금 질렸다.
며칠 전, 오랜만의 대규모 술자리에서 곧 있으면 독일로 떠나는 친구를 만났고, 나중에 한번 놀러 오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어제 나는 작업실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듀오링고 독일어 코스를 시작해 봤다. Hallo. Wasser, Bitte. Brot und milch, Bitte. Danke. Wein oder Bier? Bier. Ja. Nein. Ja oder Nein? Nein. Nein! Nein!! Nein!!! Tshüss. 아무런 기초가 없어서 1단계부터 시작해 보니 안녕. 물, 부탁해요. 빵과 우유. 고마워요. 와인 또는 맥주? 네. 아니요. 안녕. 정도의 단어를 계속해서 읽고 쓰고 골랐다. 작업실에 아무도 없고 나는 심심했기에 크게 소리를 내며 몇 개의 레슨을 치렀다. 나인! 나인!! 소리를 지르다 보니 기분이 왠지 들떴는데―어쩐지 이태리어도 재밌게 했지만, 지금은 좀 복잡해져서 레슨을 등한시하기도 했고―어쩌면 독일어가 내게 좀 잘 맞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스쳤다. 한참 소리를 지르다가 레슨을 마치고 나니 고요한 작업실이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기에, 나는 방금 배웠던 단어를 말하는 것을 녹음해 보기로 했다. 약간 독일어 특유의 거친 발음을 우스꽝스럽게 내는 여러 매체를 봐온 터라 방금 수업에 임하는 나의 읽기도 그런 톤이었고, 녹음하는 시점에서는 이미 명확한 지향점을 갖게 됐다. 나는 마치 성난 히틀러처럼 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녹음에 임했고, 녹음된 음성을 들었을 때 생각보다 나의 말하기와 녹음된 말하기 사이의 괴리가 적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내가 평소에 말할 때,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어눌하게 말해야지!”라는 목표를 가진 적은 없으나, 아무래도 등대가 없으면 항해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성난 히틀러처럼 독일어를 뱉어야겠다는 명확한 지향점이 있었기에 실제 내 목소리도 그곳으로 향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평소에 어떤 목표를 품고 말을 해야 할까? 아무래도 성난 히틀러처럼 말하며 일상을 보낼 자신은 없기에, 아쉽지만, 아직도 나는 어떤 목소리로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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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세계》 첫번째 묶음
최주원
조각과 글쓰기를 합니다. 최근 ‘두 발이 움직이는 한, 어디든 갈 수 있다’라는 생각에 걸어서 귀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