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하는 것」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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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이야기들이 한정된 여과지를 지닌 나의 몸을 통과한다. 내게 들리는 이야기는 이미 내가 한 번 즈음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거나 접한 것들일 것이고, 깊숙이 와닿는 진동들은 나와 친연성을 지닌 부분적 자아의 말이자 소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어떤 이야기는 한정되고 편협한 나의 몸과 귀에 닿기도 전에 유실될 것이다. 귓가를 맴도는 것조차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그러한 실패로부터 출발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실패할 것인가이다.

애도를 실패한다. 듣기를 실패한다. 애도와 듣기의 실패로부터 어떻게 실패할 것인가 묻는 질문은 윤리적 차원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윤리 담론, 특히 애도에 관한 윤리적 고려는 자본 담론과 거리가 멀다. 애도는 죽음이라는 종말 앞에서 머물고 헤매고 미끄러지기를 택한다. 잃어버린 대상을 끊임없이 이승으로 불러들인다. 생과 사가 동시에 존재하는 풍경을 모색한다. 그럼으로써 오로지 생만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자본의 논리, 더 정확히는 생산과 재생산, 생장과 성장만을 추구하는 가속의 세계를 어그러뜨린다. 동시에, 육신을 지닌 애도하는 자는 망자와의 공존이 상실과 비애, 불가능의 반복 속에서만 가능함을 마주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은 상실을 수반한다. 상실을 껴안은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사의 궤적을 그린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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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는 매순간 미세하고 거대하게 변화한다. 그럼에도 떨쳐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건 망설임과 머뭇거림이다. 당사자보다는 목격자의 위치에 가까운 지금의 자리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러다 결국 나는 혼자서는 말할 수 없음을 알아차린다.

이제 고민은 어떻게 들을 것인가로 이어진다. 무엇/누구의 소리를 찾아 들어야 하는지, 어떤 태도와 관심으로 그 듣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지 묻는다. 두터운 피막을 보호막으로 두른 이 몸을 지니고 있는 한 ‘온전한 듣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온전한 듣기에 준하는 상태를 어떻게 지속하고 연장시킬 수 있는지 묻는다.

듣기. 왜 소리 내기가 아니고 듣기인가? 소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담을 수 있는 매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애초부터 소음과 침묵으로 존재하는, 소리 아닌 소리에 있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소리는 다성적으로 흩어지는 세이렌들의 울림과 오르페우스를 망각의 늪에 가두는 침묵으로, 내장 감각에서 오는 살점의 울림으로 드러났다. ‘소리를 어떻게 낼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에 주목해왔던 것이다. 내게 소리는 ‘듣기’의 문제이다.

듣기에 대한 몇 가지 차원에서의 재고.3 듣는 행위는 보는 행위에 비해 덜 주체적이고 더 관계적인가? 눈은 감아버린다는 선택지가 있지만 귀는 닫을 수 없음을 염두한다면, 그렇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인식존재론적 오류가 있다.

먼저, 물리적으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자를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비장애중심주의적 전제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볼 수 없는 자와 들을 수 없는 자뿐만 아니라 모든 몸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불능이 각인되어 있다. 어떤 불능을 담지하느냐에 따라 감각의 관계적 특성의 정도는 달라진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감각의 우열을 가르는 행위는 존재의 차이를 배제와 차별의 기제로 삼을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들을 수 없게 하는 환경과 그로 인한 구조적 차별에 대한 숙고는 듣기에 대한 실천을 고민하는 동안 함께 가져가야 하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또다른 오류는 청각은 시각에 비해 외부에 비의지적으로 노출되야 하는 순간이 많다고 할 지라도 듣기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청각이 듣기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생물학적 기관 감각이라면, 듣기는 그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온몸을 기울여 쓰는 의지와 선택에 의한 행위 실천이기 때문이다. 다른 감각 기관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청각 기관 또한 행위자가 듣는 자로서의 페르소나를 어떻게 담지하는가에 따라 듣기의 형태는 달라진다.

김애령은 푸코의 분석을 빌려 청자의 권력에 대해 언급한다. 근대 지식 권력은 “듣는 위치,” 즉 “의사, 교육자, 재판관의 자리에서 ‘고백’을 요구한다.”4 힘을 가진 자는 듣고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에 반해, 고백해야 하는 화자는 청자의 해석과 평가를 받기 이전부터 공적 말하기에 부합하도록 부 서 진 말의 표면에 기성의 기표를 덧입혀야 한다. 화자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의미의 상실을 경험한다. 청자는 듣는 동시에 듣지 않음으로써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유지한다. 여기서 듣기의 관계적 실천은 실패하며, 청자에게 가닿지 못한 채 맴도는 말들은 변방으로 흩어진다.

실제로 현실정치에서 권력의 자리에 있는 이들의 귀에 가닿을 수 있는 말은 언제나 공적 형태로 가공되어야 한다. 이러한 한계로부터 고민의 가지가 한 줄기 뻗어 나온다. 선별된 말 이전의 소리와 침묵,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당신이 하지 않은 말과 하지 못한 말, 말줄임표과 쉼표 혹은 침묵 속에 숨겨진 말들을 들으려면 나는 나의 귀와 몸을 어떻게 훈련해야 할까?

글을 쓰자고 다짐한 것은 예민한 귀가 되기 위한 조건과 환경을 톺아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르겠다. 침묵이 귓가를 스친다. 침묵으로 이어지는 말줄임표를 가늠한다. 들을 수 없는 환경을 묻는다. 들리지 않는 것들의 자리를 더듬는다.

나의 듣기에 대한 관심이 듣는 몸에 대한 윤리적 성찰과 요구로, 듣기의 윤리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들을 것인가? 냉소와 폭력과 같은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는 윤리적 방법론으로서 애도와 듣기에 관해 묻는다. 타자의 침묵까지도 살펴 들을 수 있는, “충분히 날카로운”5 동시에 온전함에 가깝게 자신을 비우고 들을 수 있는 귀를 단련하고자 한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질문하고 온전함에 가까운 듣기로 이어가는 대화를 만들어 갈 방향을 살핀다.

불가능성을 통과하며 수행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불가능성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듣기의 윤리적 실천은 시작한다. ‘모두 말하기’, 즉 자기 사유의 움직임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을 뜻하는 파레시아(pharhesia)의 근간에는 듣기가 있다.6 진실을 말하는 파레시아스트의 수행은 이를 수용하는 파레시아스트의 경청을 통해 비로소 행해진다.


말할 수 없는 자가 침묵 속에서 파레시아를 행한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가?






1 본 글은 사회적 참사에 대한 애도를 중심으로, 기억의 수행성과 듣기의 윤리적·정동적 층위를 살펴보고자 2025년 4월 펴낸 아티스트 리서치 북 『애도하는 귀』에 실은 글의 일부임을 미리 밝힌다.
2 “애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 「폭력, 애도, 정치」, 『불확실한 삶』, 경성대학교출판부, 2008, 48쪽)
3 듣기로 나아가기 전에 잠시 청각에 개입하는 것들을 떠올린다. 노이즈 캔슬링을 비롯한 천차만별의 음향 기술들과 장치들이 개발된다. 서라운드 사운드(surround sound), 공간 음향(spatial sound), 소리 풍경(soundscape), 사운드 디자인(sound design) 등 소리 옆에 여러 단어가 붙는다. 문제는 새로운 합성 기표들의 실현가능성의 여부에 자본이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점이다. 시각에 개입되는 무수한 스펙타클이 청각으로 옮겨 간다. 이어폰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것은 당신이 소음으로 규정하는 것들을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가? 당신의 이동성을 보강하는 무선 장치인가? 헤드셋을 사용하는 당신은 어떤 오디오비주얼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가? 청각의 입구인 귀는 정말 열려 있는가? 서로의 기억을 듣는 행위로부터 이야기는 매번 새로 만들어지고,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원한다면 언제든 귀를 닫을 수 있는 시대에서 공동의 기억 짓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4 김애령, 『듣기의 윤리: 주체와 타자, 그리고 정의와 환대에 대하여』, 봄날의박씨, 2020, 210쪽.
5 위의 책, 151쪽.
6 “파레시아는 언제나 두 항을 갖는 작용입니다. 파레시아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설령 우리가 쌍방 중 일방, 즉 인도를 행하는 지도자 측이 파레시아의 능력을 갖고 있고 또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고 또 텍스트가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할지라도, 사실 파레시아는 두 사람 사이의 작용이고,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고 전개되며, 각자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기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미셸 푸코, 오트르망 옮김,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ebook], 동녘, 2018, 51쪽 )“파레시아는 어원적으로 ‘모든 것’을 뜻하는 ‘pan’과 ‘말해진 바’를 의미하는 어근 ‘rêma’의 합성어로 ‘모든 것을 말하기’를 의미한다.” (조남주, 「담론적 실천으로서 파레시아」, 『시대와 철학』 31.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 232쪽) 조남주는 담론 실천으로서의 파레시아가 진실된 말하기와 실천의 합일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파레시아의 담론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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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세계》 첫번째 묶음

유은
존재들 간의 관계맺기 방식에 관해 여러 질문과 시도를 하고 있어요.

https://ururu.cloud/~soundn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