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모래, 먼지: 머물며, 지나가는
[바람]
사하라에 도착한 다음 날, 모래폭풍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 위성 이미지로만 보아오던 모래폭풍을 처음으로 마주한다는 생각에 조금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이 밤새 나무창문을 흔드는 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침대 시트 아래에도, 머리카락 사이에도, 심지어 귓속에도 모래가 스며들었다.
그날 밤 내가 들은 것은 바람 소리라기보다 바람이 무언가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였다. 바람은 나무 창틀과 진흙벽의 갈라진 틈을 지나며 자잘한 마찰음을 냈다. 바람 자체에는 소리가 없으며, 다만 바람이 지나가는 길에 놓인 것들이 잠시 소리를 빌려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날 밤에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모로코 사람들은 바람을 ‘리흐(Rih)‘라고 부른다. 이 말이 영혼과 숨과 향기를 함께 가리키는 ‘루흐(Ruh)‘와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말의 바람에도 비슷한 결이 있어, 숨을 쉴 때의 숨결과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한 단어로 부르고 있으니 어쩌면 사람의 안과 밖을 오가는 어떤 것에는 어느 언어에서나 비슷한 이름이 붙는 모양이다.
사막에 머무는 동안 나는 바람을 자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바람이 무엇을 지나며 내는 소리를 들었다. 마른 풀잎을 스칠 때, 모래언덕의 능선을 가만히 깎아낼 때, 내 귓바퀴에 들어와 잠시 머물다 갈 때. 바람은 늘 다른 것을 빌려 자기의 존재를 알렸고, 어떤 날은 너무 미세하여 소리라기보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기척에 가까웠다. 영혼과 바람이 어쩌다 한 단어가 되었는지 그 자리에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모래]
모래에도 소리가 있다. 아주 작은 소리다.
발을 디디면 모래는 짧게 한 번 바스락거리다 조용히 흘러내린다. 모래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는 입자들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가늘지만, 귀를 가까이 대어보면 분명히 거기에 있어, 흐르는 물 같기도 하고 멀리서 들리는 비 같기도 하다. 손에 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단단한 줄로만 알았던 것이 사실은 액체에 가까운 무엇이라는 것. 사막에서 나는 그 생각을 오래 곱씹었다.
영어 ‘sand’와 네덜란드어 ‘Zand’의 뿌리는 ‘갈다’라는 동작에 닿아 있다고 하니, 모래란 결국 무언가가 부서지고 갈려나간 끝에 남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말 ‘모래’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일설에는 물과 작은 알갱이가 합쳐진 말이라고도 하는데, 물가에 모이는 작은 것들이라는 풀이가 마음에 든다. 모로코에서 사막의 모래는 ‘람라(Ramla)‘라 불리는데, 이 말은 모래 자체보다 모래가 만들어내는 언덕의 형상을 가리키는 쪽에 가깝다. 같은 물질을 두고 어디서는 그 기원으로, 어디서는 그 자리로, 어디서는 그 모양으로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결국 우리는 늘 사물의 어느 한 면만을 부르며 살고 있는 셈이다.
사막에 머무는 동안 오래전에 읽은 한 권의 소설을 자주 떠올렸다. 1962년에 쓰인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도쿄대 의대를 나온 의사이기도 했던 코보에게 모래는 풍경이 아니었다. 그의 소설 속 모래는 피부를 뚫고 폐로 들어오는 침입자였고, 식탁을 함께 쓰는 동거인이었으며, 끝내는 주인공의 살이 되어가는 무엇이었다. 사막의 모래를 직접 밟아보고서야 나는 코보가 왜 모래를 그렇게 썼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모래는 풍경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물질의 사건.
스테이시 알라이모는 이런 몸을 ‘횡단신체적인(trans-corporeal) 몸’이라 불렀다. 닫힌 단위가 아니라, 물질이 끊임없이 통과해 지나가는 통로로서의 몸. 수없이 읽었던 알라이모의 문장들을 비로소 살갗으로 이해한 날들이었다. 매일 밤 침낭을 털어내도 다음 날 아침이면 모래가 다시 그 안에 들어와 있다. 피부와 머리카락 사이에도 늘 모래가 까끌거렸다. 어쩌다 눈물이 흐르면 그 눈물에도 모래가 함께 흘러내렸다.
[먼지]
먼지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오래 듣게 되는 소리이기도 하다.
영어 ‘dust’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구름처럼 피어오르다’라는 동작에 있다고 한다. 피어올라 시야를 흐리는 것, 잠시 떠 있다가 다시 가라앉는 것. 네덜란드어 ‘stof’는 흥미롭게도 ‘재료’를 뜻하는 단어와 한 몸을 이루는데, 먼지가 곧 만물의 기본 재료라는 듯한 그 발상이 나는 늘 좋았다. 우리말 ‘먼지’는 ‘멀다’에서 왔다는 설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시야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풍경을 흐리게 하는 것이라는 풀이가 어쩐지 마음에 오래 남았다. 모로코에서 먼지는 ‘그바르(Ghbar)‘라 불리며, 그 뿌리에는 ‘머무르다’와 ‘지나가다’가 함께 들어 있다고 한다. 머물면서 동시에 지나가는 것. 먼지를 이보다 정확하게 부를 수 있을까.
사막에서 나는 먼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사하라의 먼지를 따라 사막까지 온 것이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1962년 5월 1일을 자주 떠올렸다고 해야 옳겠다. 그날 알제리 사하라의 한 산 아래에서 프랑스 식민정부는 ‘베릴(Béryl)‘이라 이름 붙인 지하 핵실험을 진행했다. 산이 갈라졌고, 방사능을 머금은 가스와 먼지가 사막 위로 솟구쳤으며, 바람은 그 먼지를 사막 너머로 천천히 실어 날랐다. 사막에서 나는 이 먼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지금 내가 들이마시는 이 공기 속에도 그 먼지가 여전히 떠다니고 있을지 모른다고.
아베 코보가 『모래의 여자』를 쓴 해 또한 1962년이었다. 같은 해, 한쪽에서는 모래에 갇히는 한 남자에 대한 소설이 쓰이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산이 갈라져 보이지 않는 먼지가 사막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1962년의 우연을 오래 마음에 두기로 했다.
들리지 않는 먼지는 지금도 우리를 통과하고 있다. 폐포와 피부에 닿고, 세포를 관통하며. 1962년의 먼지는 들리지 않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 진동으로, 지금도 누군가의 몸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 몸을.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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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떠나기 전, 이웃에 사는 압델에게 당신에게 사막은 어떤 곳이냐고 뜬금없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사막이 자신의 마음 같다고 하였다. 어디에 있든 결국 그리워하게 되는 그런 곳이라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였다. 듣는다는 것은 귀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몸 전체로 무언가가 통과하기를 가만히 허락하는 일이라고. 바람이 영혼과 한 단어인 것처럼, 모래가 부서진 끝에 남는 것인 것처럼, 먼지가 머물며 동시에 지나가는 것인 것처럼.
사막을 떠난 지금도 그 소리들은 어딘가 내 몸에 남아 있다.
들리지 않는 채로, 그저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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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세계》 첫번째 묶음
연성
인간사를 물질 Matter(s) 의 서사로 다시 쓰고, 실천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음원. Wind, Sand, D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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